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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2017_그저 조금 움푹 파인, 덩 어 리 _김소라

그저 조금 움푹 파인,       

 

 

드디어 이곳에서

 

발끝에서 

 

무너지지 않는 각도로1

 

 

이해민선의 전시 《덩 어 리》(플레이스 막, 2017.5.1~5.30)를 보고 들어온 날, 저녁내 방 안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이리저리 걸어보았다. 그녀의 작품 〈덩어리입니다〉(2017)에 적혀있던 “살고 있는 땅엔 발뒤꿈치가 없습니다.”라는 글귀가 머릿속에서 줄곧 맴돌아서였다. 뒤꿈치가 없는 삶은 어떤 것일까? 내가 비록 ‘땅’은 아니지만, 그 상태가 궁금하니 시늉이라도 내보고자 한 일이다. 그런데 의외로 제법 괜찮다. 어정쩡한 포즈로 뒤뚱거리지만 물도 마시고, 먼지도 닦고,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움직이는데 약간의 불편함과 불안정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끝나거나 삶이 비극적으로 되지는 않을 정도였다. “그저 조금 기울어진 채”2 그렇게 있을 뿐. 

 

플레이스 막에서 마주한 이해민선의 그림에 나타난 것들은 모두 어딘가 불편한 몸을 하고 있었다. 산은 허리가 움푹 파여 적토(赤土)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나무는 저 스스로 바람을 막지도 못해서 비닐을 칭칭 감고, 베니어 합판에는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식이다. 사람의 형상을 한 흙덩어리도 발견할 수 있는데(〈무른 땅에서〉(2017), 〈덩어리입니다〉(2017)) 그마저도 척추가 없는 짐승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거나, 눈 코 입도 없이 뭉툭한 팔다리를 끌고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기관(器官)이 없는 듯하기도 하고, 성치 않은 몸으로 닥친 상황에 순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의연하게 지탱하고 있는 듯까지 하다. 이해민선의 작품 속에서 꾸준히 엿보이는 불구성(不具性)은 사물들이 처한 조건이자 살아가는 방식으로도 보이는데, 그 형태는 종종 제 몸이 아닌 것과 덧붙여져서 보완되곤 하였다. 

 

 

이미 〈‘APT’라는 이름의 짐승〉(2008) 등의 드로잉에서 그 전조를 찾아볼 수 있지만, 이해민선의 작품에서 기계와 자연, 인공물과 또 다른 인공물이 한 덩어리로 묶인 이종(異種) 결합의 소재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개인전 《물과 밥》(아마도 예술공간, 2013)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쌀과 밥’도 아니고 심지어 ‘물과 밥’이라니. 비유와 추론의 과정을 몇 단계쯤 건너뛰어버린 듯한 생경하기 짝이 없는 제목의 전시에서 등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도 희한하게 어울리는 사물의 조합이다. 플라스틱 빨대에 의지한 나뭇가지, 묵직한 시멘트 덩어리 사이에 불필요하게 섞여 굳어버린 파란 비닐 등 유용성과 효용성의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으나 실상은 뒷골목에서 언제 마주쳐도 놀랍지 않을 것들. 인증받지 못한 변방의 삶을 모아놓은 듯한 드로잉과 설치에서는 불완전한 것들이 태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때 불완전한 것이란 ‘흠 없이 완벽하다(perfect)’는 의미와 ‘전체로서 온전하다(whole)’의 의미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지 못함인데, 그런 완결성이나 전체성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냐는 듯 작업은 통념의 범주에서 미끄러져 갔다. 실제 나뭇가지가 가공된 나무젓가락이나 각재와 한 몸으로 엮인 〈직립식물〉(2011)이나 〈묶인사이〉(2011)처럼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도 흐릿해졌는데, 그것이 내부의 모순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살아간다’는 진술과도 같았다. 이후 건축 단열용 스티로폼과 마른 나뭇가지, 거기에 드로잉이 한데 얽혀있던 〈무생물 주어〉(2016) 역시 보잘것없다 여겨지는 파편들이 꾸려내는 사물세계였다. 피가 흐르지 않아도, 맥이 뛰지 않아도, 한낱 퇴색된 물건일지라도, 저마다의 일상과 생태계가 구축되고 있는 이해민선의 작품을 마주할 때면 할 말을 잃고는 하였는데, 그것은 그녀의 작업이 언어의 체계, 즉 합리성의 테두리 안에서는 형상화되지 않는 사유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세계가, 이번 전시에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기압과〉(2011) 그리고 〈육지는 금방 차가워졌고〉(2013)와 같은 그림에서 보여주었던 질식할 것 같던 진공 상태의 들판에 물웅덩이가 생기고, 불완전한 사물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강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연약한 몸을 숨기지도 못한 채 자연은 자연대로, 사물은 사물대로 저 ‘무른 땅’에서 제각각 ‘포즈’를 취하는데, 거기에는 어떤 연민이나 부끄러움도 없어서 저 삶의 태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오히려 자꾸 보고 또 보게 된다. 

 

 

 

삶의 토대인 땅. 하지만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여줄 ‘겉’도 없이, 제 보드라운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낸 맨땅. 《살갗의 무게》(합정지구, 2015) 전시에서는 사진의 ‘살갗’, 인쇄된 잉크를 화학약품으로 벗겨내며 그 속을 열어보더니, 이번 전시에서는 겉이 곧 속이고, 속이 곧 겉인 축축한 땅이 그림의 전면에 나섰다. 이해민선에게 땅이란 주어진 환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그 자체가 현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헐벗은 땅도, 그 땅을 딛지 못하는 비루한 몸덩이도, 이런 존재이거나 저런 존재이거나 사실은 우리 모두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류이지 않으냐고 작품은 되묻는 듯하다. 그 땅의 헐어진 비탈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흙더미는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는 물감의 흐름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더 아래로, 핏줄기처럼 끈적하게 제 흔적을 캔버스 위에 길게 드리우는데, 이마저도 이해민선의 자그마한 체구가 온몸으로 덤벼들어 움직인 붓질에 하릴없이 쓸려가곤 한다. 팔꿈치를 들어 좌우로, 사선으로, 크게 휘두르는 작가의 제스쳐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번 작품은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이라는 질료에서 비롯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인식이자 존재의 분투가 된다. 

 

 

그런데 이해민선의 무른 땅에는 뾰족한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언덕의 허리만 싹둑 잘라온 듯한 풍경에는 아예 〈중턱〉(2017),  〈봉우리〉(2017)라고 작품명을 붙여놓기도 하였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딘가 그 몸에서 연결된 더 큰 실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만을 남기는데, 만약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면 그것은 유추로만 가늠할 수 있는 세계의 원형이자 근원일 테다. 하지만 이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사고는 형이상학을 향할지언정, 시선은 오히려 현재에 머무르게 된다. 가령, 봉우리가 없는 산을 점토로 빚은 후, 이 조소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산과 함께 다시 그림으로 그린 〈봉우리〉(2017) 연작에 대하여 쓴 작가 노트에서 이해민선은 “그림 속, 산은 전체인지 일부인지 모를 일이나 덩어리는 미완의 것이 아닌 온전한 하나의 덩어리 전체이다. 그 덩어리엔 봉우리가 존재한다.”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빚어진 ‘나의’ 봉우리는 당장 내가 살아가는 세계이자, 내가 만들어내는 세계이다. 그 땅에 속한 ‘나’는, 삶 속으로, 일상의 낮은 곳으로, 도시의 변두리로 관찰자의 시선을 던지며 현 상황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 짐짓 무심한 듯 격정의 감정은 접어둔 채, 조금은 해어지고, 조금은 누추해지고, 조금은 제멋대로 얽혀있지만 그래도 ‘덩어리’로서 덤덤하게 살아가는 것은 ‘절정 없는 곳’에서 지금을 버티어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또 다른 출품작 〈성미산에서 온 성미〉(2017)에서는 나무의 몸통과 나무처럼 보이는 것을 그려놓은 드로잉이 매끈하게 깎인 목재 좌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껍질로 둘러싸여 있는 나무와, 나무를 지탱하는 보호목과,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과, 나무옹이를 닮은 사람의 무릎과, 바짝 마른 잎사귀를 달고 있는 실제 나뭇가지 등이 닮은 꼴로 나열되어 있는데, 각 대상을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저마다 외발로 서 있는 것처럼 여겨지다가도, 이 드로잉-설치를 한 데 아울러 놓고 보면 모양이 들쑥날쑥한 덩어리들의 군집으로 보였다. 사람이거나 식물이거나 사물이거나 그림이거나, 한 덩어리이거나 여러 덩어리이거나, 제 부피만큼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점에서는 모두 균등한 것은 아닐까.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서로 더 대단할 것도, 더 못할 것도 없는 그저 ‘덩어리’일지도 모르겠다. 

 

 이해민선의 작품을 보고 오는 길이면 반복하게 되는 버릇이 하나 있다. 자꾸 바닥을 내려다보게 되는 것인데, 그러다가 꼭 손바닥 안에 들어올 만한 크기의 조그마한 돌멩이를 하나씩 주워온다.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포장된 길로만 다니는데도, 어디서 그렇게 돌멩이가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다. 책장 구석에 던져놓았던 돌멩이들을 다시 보니 “어이쿠, 여기에도 덩어리가 있네.” 싶다. 완벽하게 동그랗거나 꼭짓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가 조금 움푹 파인 덩어리다. 이렇게 요철이 있으니 때도 끼고, 닳기도 하고, 또 그래서 제각각 모양을 갖추어갈 테니, 모두 다 덩어리인데, 전부 다 다른 덩어리이다. 덩어리를 빚어내었던 이해민선의 무른 땅에 스며든 물은 이제 어디로 흐를까, 그 〈유추의 강〉이 향할 풍경이 더욱 궁금해진다.

 

 

 

김소라 (OCI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