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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이해민선의 그림들_이우성

#4. 이해민선의 그림들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 나무를 열고 나온 사람 _ 이해민선의 그림들

 

 

 

“이우성 시인, 왜 ‘7인의 작가전’에 미술 기사를 씁니까?” 

존경하는 선배가 전화를 걸어 말했다. 

“미술 기사 아니라 일기예요.” 대답하고 싶었으나, 선배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알아서 가만있었다. 일기라면,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별로 그런 느낌이 안 드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가 없다. 사실 나는 웃긴 사람이고, 글도 웃기게 쓰는데 ‘그림일기’는 그렇게 못 쓰고 있다. 그림이라는 게, 웃기기 너무 어려운 장르다. ‘너무’라는 부사를 남용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7인의 작가전’에서  ‘그림일기’의 조회수가 가장 적지 않을까. 너무!

그런데 이번에 쓰기로 마음먹은 작가는 이해민선이다. 스크롤을 죽 내려서 아래 있는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엄청나다. 저 그림들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 사실 지난주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 ‘콘셉트를 잘 못 잡았어. 그림일기가 뭐니. 그림은 시만큼이나 어려운 거잖아.’ 그 생각은 지금 절정이다. 이해민선의 그림을 보고 있으니 막막하다.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글도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서없다. 나는 이해민선을 안다. 개인적으로 아는데, 어떻게 아는지, 만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 그때 만났지,라고 추측은 하는데, 그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알고, 4~5년에 한번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당연히 전화번호는 안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한다. 나는 그녀를 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작품도 보게 됐다. 처음 본 작품은 ‘APT라는 이름의 짐승’이다. 아파트 발코니 도면 위에 컴퓨터로 드로잉한 작품인데, 보자마자, 어, 이거 뭐야, 어이없네, 라는 생각이 든다. 도면이 짐승이 되니까. 분명히 도면인데 짐승이…. 

‘직립식물’ 연작도 봤다. 종이 위에 그린 수채화다. 작가는 나무 몸통, 나무다리를 가진 개 혹은 고양이 형태의 짐승을 그렸다. 그림을 보면 혹시 이 작가가 나무로 정말 저런 것을 만들기도 하는 게 아닐까, 의문을 품게 된다. 자료를 찾아보니 나무젓가락으로 정말 만든 것 같다. 나는 이해민선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어서 좋다. 이해민선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기 위해 찾아다닌다. 내가 이해민선의 그림을 통해 느끼고 보는 것은 그 ‘절실함’이다. 그 절실함이 어떻게 생겼냐? 모호한 표현 아니냐? 라고 되물을 수 있다. 그 물음은 정당하다.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그저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나도 예술가니까, 작품의 발상과 형태가 어떻게 작가에게 도달하는지는 안다. 아니, 느낄 수 있다. 

이해민선은 붕 떠있지 않다. 깊이 보고 오래 관찰해서 기어이 문을 발견해낸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예를 들어 나는 시에 이런 문장을 쓴 적이 있다. ‘그가 벽에 문을 그리자 / 문이 열렸다’ 내가 그린 걸, 이해민선도 그렸을 거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 ‘육지는 금방 차가워지고’라는 그림을 보면, 육지가 붉다. 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목처럼 금방 차가워지겠지. 이해민선이 그린 육지는 근육을 가지고 있다. 움직인다,기보다는 움직임을 품고 있다. 중앙 우측에 이젤처럼 보이는 무엇이 있다. 이 물체는 하얀 천에 싸여 있는데, 그 안에 산과 대지와 하늘이 그려져 있다. 나한텐 그렇게 보인다. 이해민선이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한 것은 육지의 표면이 아니라 육지의 내면, 육지의 기억, 육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 육지의 미래, 육지의… 무엇일까, 그것은 나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이 작품은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시가 잘 써지지 않을 때 이 그림을 가끔 본다. 인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려고. 그런데 이해민선은 저 붉은 육지 뒤편의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혹은 무엇일지 알아냈을까? 

이해민선은 이 그림을 면 소재의 천에 그렸다. ‘나와 말한 적 없는 사람’은 나무 위에 그렸다. 나무? 정확하게 말하면 나무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로 그었다. 나무의 살결을 종이에 옮긴 것이다. 이해민선은 이렇게 채취한 나무의 피부를 들고 작업실로 돌아가서, 사람의 피부로 바꾸어 그렸다. 그러니까 그림 속의 남자는 나무의 일부다. (‘사람나무’라는 시가 있다. 내 시다.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 살짝 홍보해봅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발상이 낯설지 않다. 늙은 나무에서 사람을 보고, 낯선 남자에게서 나무를 본다. 이것을 공존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자연과 인간은 어쩌면 한 몸처럼 연결돼 있다고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분명 옳겠지만… 나는 그저 쓸쓸하다,고 혼잣말할 뿐이다. 나무도 사람도 쓸쓸해 보인다. 그림 속의 남자는 추하다. 특히 코 부분. 아, 지금 자세히 보니 이 부분의 선은 완전히 나무의 결 그대로다. 그의 이목구비를 보면, 그가 감각을 받아들인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희미하게 보고, 희미하게 호흡하고, 희미하게 듣는 것만으로 살아지는 삶을 살고 있다. 옷은 검다. 이 남자의 형상이 이해민선의 현실 인식 같아서 슬프다. 

‘웅덩이-채석장’은 사진 위에 그렸다. 저 위에, 내가, 이해민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다닌다고 썼는데, ‘나와 말한 적 없는 사람’이 그런 작품이고, ‘웅덩이-채석장’ 역시 그렀다.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게 뭘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간단히 얘기하면 이렇다. 인화한 사진 위에 화학약품을 뿌려서 사진 표면을 녹인다. ‘웅덩이-채석장’은 그 녹은 물질과 화학약품을 섞어 문지르며 그린 그림이다. 이 과정을 이해하는 것과 더불어, 왜 채석장일까, 거기 왜 웅덩이가 있을까를 생각하는 게 이해민선의 그림을 보는 방법이다. 

그런데 무엇을 찍은 사진일까? 사진에 뭐가 담겨 있을까? 돌산이다. 돌산을 찍었다. 돌산을 채석장으로 바꿔 그렸다. 채석장은 자연의 일부, 즉 돌을 도려내는 장소다. 그렇다면 화학약품은 인위적인 힘이겠지. 독재와 무책임한 개발을 상징할 수도 있겠다. 화학약품으로 사진을 녹이면 냄새가 난다. 인상을 찌푸리며 이해민선은 그렸겠지. 나무에서 사람을 발견하는 일은 뭐 쉬웠겠어. 그 과정도 슬프고 아프지. 적막한, 어쩌면 감정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붉은 대지를 그리는 일도 유쾌하진 않았을 것이다. 절실함이라는 거… 고통과 마주하는 의지가 아닐까. 오래 보고 오래 견디는 마음…. 

그녀에게 회화나 드로잉은 그저 그리는 행위가 아닐 것이다. ‘레이어’를 입히는 일인데, 그녀는 현실을 치열하게 들여다보며 그 ‘레이어’를 발견해낸다. 하지만 이해민선 작가님, 문을 열고 깊이 들어가면, 그렇게 깊이깊이 들어가면, 다시 바깥으로 나오는 길이 멀고 고되지 않나요? 라고 나는 말하고 싶기는 하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그녀가 나에게 메일로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일 때, 작가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했어요. 무척 괴로웠고요,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광장에서 시위에 동참하는 게 아니라, 작업실에 안아서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략 이런 맥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해민선의 그림을 자연과 인간과 기술이 공존하는 어떤 형태로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현실과 맞서서 무엇인가 발견하고 극복하고 있다는 생각, 적어도 그런 의지를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존경하고 존중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 어떻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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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민선은 1977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현실을 돌파하고 극복하는 방식으로 그림을 선택한 게 아닐까? 그림은 그녀의 도구다,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림은 그녀가 아픔을 견디는 방식이다. 그녀는 진지하게 삶을 관찰하는데, 그녀에겐 그것을 기록하는 방식이 그림밖에 없다. 그렇지? 그런가요? 당신은 오직 기록하면서 희망을 발견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