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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que

2017_류병학_이해민선의 ‘덩어리’를 찾아서

이해민선의 ‘덩어리’를 찾아서 

 

  플레이스 막(place MAK)을 찾았다. 이해민선의 개인전 <덩어리>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덩어리?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난 플레리스 막 전시장을 들어섰다. 나는 전시장 안에서 마주친 대형 회화작품을 보고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우~!(WOW~!) 와이? 그림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헐벗은 산의 흙더미가 마치 진짜 흙으로 그려진 것처럼 강렬하게 보였다고 말이다. 난 이해민선의 강렬한 그림에 매료되어 버렸다. 그런데 내가 이해민선의 작품을 보고 홀딱 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내가 처음으로 홀딱 반한 이해민선의 작품은 영상작품인 <멸치산수>(2005)이다. 

 

  2005년 이해민선은 잔치국수를 해먹기 위해 물을 담은 냄비에 멸치를 넣고 가스불을 켰다. 그런데 물이 끓으면서 멸치가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보고 ‘멸치산수’를 착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해민선의 <멸치산수>는 적당한 양의 물이 넣어진 양은냄비에 몇 마리 마른 멸치가 떠있는 풍경에서 시작한다. 물이 끓으면서 멸치들은 마치 뜨거움에 고통스러워하는 듯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그 몸부림은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왈츠 곡으로 인해서인지 마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멸치들은 3/4박자에 맞추어 딛고 미끄러지고 다시 딛는 스텝을 하듯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이다. 어느 순간은 마치 남녀가 껴안고 도는 동작처럼 두 멸치가 서로 마주치기도 한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죄책감이 드는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나는 멸치의 고통을 재미로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너의 공통이 나의 즐거움인 마냥 말이다. 더욱이 이해민선의 <멸치산수> 마지막 장면은 양은냄비 안의 물은 모두 증발해 버리고 멸치도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멸치육수의 ‘흔적’을 보게 되면, 씁쓸함이 밀려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민선은 그 멸치육수의 ‘흔적’을 ‘멸치산수(화)’로 명명한다. 물론 양은냄비에 남은 흔적은 마치 산수화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해민선의 <멸치산수>는 나에게 일종의 ‘블랙 코미디(black comedy)’로 보였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모순성이나 부조리함을 느끼게 하는 역설적인 유머라고 말이다. 

 

  물론 이해민선의 <멸치산수>에 등장한 멸치는 ‘죽은’ 멸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끓는 몰에서 움직이는 멸치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후 이해민선은 흥미롭게도 살아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의 관계에 주목한다. 이해민선의 ‘직립식물’ 시리즈는 살아있는 나무에 죽은 나무(지지대)를 접목시킨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 점에 관해 이해민선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강한 바람에 나무가 휘어지지 않도록 덧대는 자재로서의 나무막대라던가 텃밭에서 식물과 채소가 엉키지 않고, 꺽이지 않게 수직으로 자라도록 죽은 나뭇가지를 세우고 끈으로 묶은 풍경들을 응시한다. '나무 막대기_각목' 은 살아있는 나무를 죽지 말라고 지지대란 이름으로 받쳐주고 '죽은 나뭇가지'는 식물줄기를 지지대라는 물건으로 버텨주는 풍경은 나에게 한없이 생명의 지점에 대해 다시 한번 인지하도록 자극한다. 죽은 나뭇가지나 자재로서의 각목이 식물과 지지대로 만남으로서 다른 생명력으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듯하다.” 

 

  이해민선은 살아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각목)의 관계에서 천이나 비닐로 덮어진 풍경으로 시선을 확장시킨다. 그녀는 밤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밤에 산책하다보면 낮에 보았던 풍경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낮과 밤에 보았던 점포의 풍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크고 작은 점포들 앞에 낮에 팔던 품목들을 천막으로 덮어놓은 공간들은 매일 매일이 다른 모습이었다. 낮엔 보기 힘들고 어떠한 치장도 없고 스스로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덮어지고 묶여지고 굳건히 공간을 딛고 있는 것이었다. 덮어야 할 물건이 달라지거나 덮는 방식도 조금씩 차이가 나고 그럴 때마다 덮은 천막의 모습은 계절 따라 얼굴이 달라지는 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해민선은 일상의 풍경에서 자연으로 시선을 확장시킨다. 2011년 닥터박 갤러리에서 열렸던 이해민선의 개인전 <덜 죽은 자들_묶인 사이>는 광활한 자연을 배경으로 인공물들을 등장시킨다. ‘그렇고 그런 사이’나 ‘앉아서’ 그리고 이상야릇한 제목인 ‘수돗물 과’와 ‘대기압 과’ 등이 그것이다. 자, 우선 전시타이틀 중에서 ‘덜 죽은 자들’에 대한 이해민선의 진술을 들어보자. 

 

 

“생명의 의미라던가 생명의 유무, 생명의 기원, 가치 등을 말 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체와 개체가 접하는 순간을 관찰하다보면 독립적인 개체가 자신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상호작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상호작용이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회귀할 때 새로운 특질이 나타나는데 그 새로운 특질이 탄생하는 순간이 생명이 아닐까.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의 형상도 그 동물의 형상을 그리려고 다른 것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도면'을 '나무토막'을 '비닐봉지'의 특성을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바라보고 관찰하면, 그 특성들이 새로운 형상을 자아내게 된다.” 

 

‘덜 죽은 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 잡으셨죠? 자, 이번에는 전시타이틀 중에서 ‘묶인 사이’에 대한 이해민선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자. 

 

“'묶인 사이'라고 정한 것 역시 '상호작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묶여 있다고 하여 수동적이거나 갇혀있는 의미가 아니라 서로 묶인다는 것은 서로의 특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고 ‘무엇과 무엇이 만나느냐에 따라 접속의 특질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 '끈'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끈들이 각목과 각목을 이어주어서 개체의 외부적 특성을 회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낸다. 개체를 관통하거나 화학적 변이처럼 개체의 특성을 제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너무 매력적인 대상 중 하나가 끈이기도 하다.” 

 

나는 이해민선의 신작을 접근하기 위해 이전 작품들을 수박겉핥기식으로 거칠게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 단편적인 정보들은 어쩌면 이해민선의 개인전 <덩어리>를 이미 보신 분들 중에서 ‘아~ 그 작품이 그런 관점에서 그려진 것이구나’라고 독백하실 분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은 끝이 났다? 

 

 이번 플레이스 막에 전시된 작품들에도 자연과 인공물이 접목된 작품이 여럿 있다. 우선 흙더미를 배경으로 전경에 웅덩이를 덮고 있는 노랑장판을 개입시킨 대작인 <절정 없는 곳_포즈>를 보자. 그 노랑장판들 사이로 아시바가 부분 보인다. 아마도 웅덩이에 설치된 아시바 위에 발판 대용으로 노랑장판을 깔아놓은 것 같다. 

 

  그런데 듬성듬성 설치된 아시바 위에 깔려진 노랑장판이 제대로 ‘발판’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 점은 노랑장판들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해 부착한 청색테이프에서도 볼 수 있다, 노랑장판들의 틈을 청색테이프가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머시라? 그 노랑장판 밑에 합판이 깔려있다고요? 이 노랑장판에 관해 이해민선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가정용으로 사용하는 나무무늬 비닐장판 또는 노란 비닐장판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본다. 무언가를 덮어 놓거나 감싸 놓거나 깔아 놓는데 곧 다른 해결 방편이 마련 될 '임시적 사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주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래도록 거기에 놓여있다. 깊이 모를 웅덩이를 노란 장판이 아슬아슬하게 덮고 있는 풍경을 그렸다. '누구씨'의 가정에서 사용했을 장판이 공공장소의 어느 모퉁이에서 먼지에 그을리고 햇볕에 바래고 바람에 풍화되어 가장 늙은 모습으로 있다. 웅덩이가 외부 세계의 불가항력적인 혹은 인공적인 결함이라면 장판은 개인의 내부적 자원을 상징한다. 공적 외부의 결함을 개인의 내부 것들로, 임시적으로 해결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해민선의 <절정 없는 곳_포즈>에도 천으로 감싼 모습이 등장한다. 나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랑장판들 사이에 구멍(들)을 뚫어놓았는가 하면, 나무(들)을 백색천(?)으로 감싸고 분홍색 끈으로 묶어져 있다. 이 점은 3개의 시리즈로 제작된 이해민선의 또 다른 작품인 <절정 없는 곳_포즈>에서도 나타난다. 3점의 그림은 모두 흙더미 위에 녹색 그물 같은 가림막이 쳐져있고 전경에는 서로 다른 나무들이 등장해 있다. 

 

  왼쪽 그림에 출현한 나뭇가지는 백색천(?)으로 감싸고 끈으로 묶여져 있고, 가운데 그림은 나무를 비닐로 감싸고 노랑테이프로 감겨져 있으며, 오른쪽 그림은 나무들을 비닐로 감싸고 끈으로 묶어져 있다. 그런데 후경의 흙더미와 전경의 나무 모습을 보면 서로 다른 곳(자연과 일상)에 있는 것들이 접목된 것처럼 보인다. 그 점에 관해 이해민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림의 배경은 주로 경기도 용인시이며 서울과 연결되는 고속도로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대형 공사 현장 같은 공적인 움직임이 있는 풍경이다. 그 배경 앞에 등장하는 구조물들은 성산동에서 개개인이 꾸리는 식물들이다. 이러한 구성은 처음부터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풍경에서 사회적 서사가 읽히고 그 서사를 표현하려고 다시 풍경을 이용하다보니 자연스레 배경은 공적인 힘이 들어간 풍경들이 되었다. 용인은 내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곳이며 서울 성산동은 내가 사는 동네이다.” 

 

  따라서 이해민선의 <절정 없는 곳_포즈>는 마치 살아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각목)를 접목시킨 것처럼 용인시의 대형공사장 풍경과 성산동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식물들 풍경을 접목시킨 그림인 셈이다. 이를테면 용인시의 대형공사장 풍경과 성산동 어느 빨간 벽돌집 화단에 있는 하얀 방한용 스폰지로 싸여지고 하얀 줄로 묶여져 있는 나무나 임박사네 정육점 문 앞에는 반투명 비닐에 쌓여지고 노란 박스 테이프로 칭칭 감겨져 있는 열대나무 그리고 연남 세탁소 차양 봉에 파란 비닐 끈과 주황색 빨래 줄로 길게 거리를 두고 묶여진 나무를 접목시킨 그림이라고 말이다. 

 

  서로 다른 지역의 이미지들이 접목되면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해민선은 그 묘한 풍경을 ‘절정’은 없지만 ‘포즈‘는 있다고 중얼거린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절정(봉우리)는 없지만 강력한 기운이나 인상을 느끼게 하는 기운(force)은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그 작품들은 내 눈에 ’포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이다. 

 

  자, 그럼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 이해민선의 <덩어리> 말이다. 이해민선의 <덩어리>는 2년 전 합정지구에서 열렸던 개인전 <살갗의 무게>를 업그레이드한 버전으로 나에게 보였다. 이해민선의 <살갗의 무제>는 인쇄된 이미지를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녹인 것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채석장’은 돌산 사진의 이미지(잉크)를 녹여내 그린 것이라고 말이다. 

 

  이해민선은 흥미롭게도 돌산 사진의 이미지(잉크)를 녹여내 화면 가운데 마치 ‘덩어리’로 표현해 놓았다. 그렇다면 그녀는 신작에서 ‘덩어리’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일단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읽어보자. 이해민선의 대작 <무른 땅에서>는 헐벗은 산의 흙더미가 그려져 있고, 전경에는 나무판에 마치 헐벗은 산에서 파내온 진흙으로 인물(들)을 반죽하여 조각하다 만 것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그려놓았다. 

 

  서로를 향하고 있는 두 인물은 안타깝게도 바닥에 넘어져 있고, 나머지 상반신만 있는 한 인물은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 주변에는 흙물이 얼룩져있다. 도대체 이들의 관계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혹 삼각관계(三角關係)? “사랑을 고집하면 친구가 울고 우정을 따르자니 내가 우네 사랑이우네 하ㅡ필이면 왜 내가 너를 하ㅡ필이면 왜 내가 너를 사랑했나 우는 세 사람...” 

 

  이번 플레이스 막에 전시된 이해민선의 <덩어리입니다>에는 세 인물이 아니라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것은 거대한 봉우리가 있는 산 앞에 한 사람이 몸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해민선의 <채석장>에서 돌산 사진의 이미지(잉크)를 녹여내 화면 가운데 표현해 놓은 ‘덩어리’가 이해민선의 <덩어리입니다>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사람으로 전이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해민선의 대작 <무른 땅에서> 등장한 진흙으로 반죽한 인물(들)이 이해민선의 <채석장>에서 돌산 사진의 이미지(잉크)를 녹여내 화면 가운데 표현해 놓은 ‘덩어리’처럼 배경의 헐벗은 산에서 파내온 진흙이란 말인가? 이해민선은 <덩어리입니다> 그림 밑에 연필로 다음과 같은 텍스트를 적어 놓았다. 

 

  “불안은 높은 봉우리에 육신을 던져 놓고 풍장하게 하고 살고 있는 땅엔 발뒤꿈치가 없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올라 갈 수 있는 곳의 그 쯤 산허리의 흙을 한 주먹 퍼와 진흙을 반죽하며 나의 봉우리를 만들어 봅니다. 매일 휘발되는 나는 여전히 묵직한 덩어리입니다.” 

산허리의 흙을 한 주먹 퍼와 진흙을 반죽하며 나의 봉우리를 만들어 본다? 그 점은 6점으로 이루어진 이해민선의 <봉우리> 연작에서도 볼 수 있다. 이해민선은 봉우리가 잘라진 산을 배경으로 전경에 작업받침대를 설치해 놓고 그 위에 진흙으로 조각을 해놓은 그림을 그려놓았다. 

 

  흥미롭게도 작업받침대 위에 조각해 놓은 조각의 형태가 다름아닌 배경의 봉우리가 잘려진 산이란 점이다. 그렇다면 그림 속 조각의 모델이 그림(속의 배경)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림 속의 잘려진 봉우리는 불완전한 그림이라면, 그림 속 조각은 완전한 것이 아닌가? 이해민선은 <봉우리> 연작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림 안에는 산과 그 산을 모방하여 점토로 조소를 한 덩어리가 탁자 위에 놓여져 있다. 그런데 그 탁자 위의 조소된 덩어리 역시 봉우리가 잘려진 산이다. 조소된 덩어리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네모난 프레임 안의 산모양인 것이다. 그림 속, 산은 전체인지 일부인지 모를 일이나 덩어리는 미완의 것이 아닌 온전한 하나의 덩어리 전체이다. 그 덩어리엔 봉우리가 존재한다. 개인의 창조적 세계가 원형의 세계를 유추하게 하는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주체가 된다.” 

 

  이해민선은 <봉우리> 연작에 등장하는 조각(덩어리)를 ‘온전한 하나의 덩어리 전체’라고 진술한다. 왜냐하면 그 그림 속의 덩어리(조각)은 그림 밖의 봉우리가 절단된 산을 보고 제작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림에 그려진 ‘온전한’ 형태를 모델로 삼아 ‘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해민선의 <봉우리>는 자연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회화의 세계를 그려낸 것이라고 말이다. 

 

  회화의 세계로 입문한 것을 축하한다. 어쩌면 이해민선은 앞으로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를 더 이상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정치는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고 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오늘처럼 앞으로도 그녀의 ‘청춘’을 ‘정치’로 착각해 읽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해민선이 한 때 “가자 ~ 철마야 ~”를 “가자 절망아 ~~”로 노래했듯이 나 역시 그녀의 <덩어리입니다>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 모습을 펑펑 울고 있는 사람으로 오독하고자 한다. 와이? 왜 그 사람을 울고 있는 사람으로 오독하느냐고요? 왜냐하면 나는 이해민선의 <무른 땅에서> 나타난 삼각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머시라? 혹 이해민선이 ‘사랑을 따르자니 친구가 울고, 우정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는 삼각관계에 얽혀있느냐고요? 모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해민선의 <무른 땅에서>를 보고 있노라면 애틋한 삼각관계가 떠오른다. 그리고 황폐한 흙더미는 그 애틋한 삼각관계를 알려주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내가 한 걸음 다가가 본 그 흙더미는 마치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감정이 복받쳐 나는 이해민선의 그림에 사로잡혔다. 

 

 물론 그 삼각관계의 끝은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이 났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끝났다”고 하지만 또 다른 사랑을 꿈꾼다. 그쵸?